예수님은 친히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가르치시고, 기적와 이적을 보여 주셨다.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말이다.
그럼에도 12명의 제자 중에 한 명인 유다는 돈과 정치적 이념에 눈과 이성이 마비되어 예수님을 사형장으로 이끌었고 가장 유별나게 믿었던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스승님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유대인들 손에 죽으셨지만 결국 그 시작과 끝은 3년 키운 제자들의 손에 배신당하고 모욕당하고 죽으셨던 것이다.
이런 제자들앞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다. 나 같으면 그것들 괘씸해서 처다 보지도 않을 것 같지만 예수님은 친히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러면 제자들은 용기 백배하여 거리에 나가 "유대인들아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외쳐야 하는데 각기 제 살길로 뿔뿔히 흩어졌다.
엠마오로 도망 가는 제자도 있었고, 베드로를 따라 갈릴리에서 새로운 직업 어부의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도 있었다. 이쯤 되면 예수님도 이들을 포기할 만도 하신데 예수님은 그 길에 동행하셨고 갈릴리로 친히 올라가셨다.
베드로가 오랜만에 배를 타서 그런지 밤새 그물을 내려도 고기를 잡지 못했다. 5명의 제자들이 헛고생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외치신다. "베드로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내려봐라!" 밤새 내리던 그물 무슨 변화가 있겠냐만은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다시 한번 배의 오른쪽에 그물을 내린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그물이 찢어질만큼 물고기가 가득 올라오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제야 물고기를 가득 채우고 예수님께로 왔다. 와 보니 예수님이 자기들을 위해 불을 피우시고 물고기를 굽고 떡을 만들어 놓고 계셨다. 밤새 물질을 하고 왔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그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밥이었다. 예수님은 허기진 그들의 배를 채워주셨다.
밥을 먹인 후 베드로에게 3가지 질문과 3가지 부탁을 하신다.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여기 있는 사람들 보다 니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여라”
2.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양을 치라(돌보라)”
3. "요한의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근심하여(뤼페오: 슬프게 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양을 먹여라”
예수님이 직접 지어주신 이름 "베드로"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본래의 이름 시몬을 부르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지금 예수님의 마음이 엄중한 상태이고 진지한 질문을 베드로에게 하고 계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질문은 주위에 있는 친동생 안드레와 친한 제자들을 비교하시며 질문하신다. "시몬아 니가 이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두번째 질문은 조건없는 질문을 하신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째 질문은 베드로가 근심했다. 한글 성경으로는 "근심"이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니 "뤼페오" 슬프게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단어로 기록되 있다. 즉 베드로는 3번째 질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슬픈 마음으로 대답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동일한 부탁 3가지를 하신다.
"시몬아 내 어린 양들을 먹여주고, 내 양들을 돌봐줘라"
"나를 사랑하느냐?", "Do you love me?"
왜 이런 반복적인 질문을 3번이나 하셨을까? 강조하시기 위해?
반복하신 질문속에는 다른 뜻이 있음을 생각해 본다.
예수님의 질문 속 "사랑"은
(사회적 도덕적 의미의 사랑, 전인격적인 사랑, 절대적인 사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이 바로 아가페 즉 아가파스의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속에는 이런 의미가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베드로야 니가 나를 절대적으로 네 목숨을 내놓을만큼 사랑하느냐?"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은 달랐다.
(친절하게 대하다, 환영하다, 친구가 되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향해 친구로서 우정의 사랑을 대답 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담스러운 질문에 오히려 대답을 회피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의 상태가 아가페를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번 반복하여 아가페 사랑을 물어 보셨지만 베드로는 우정을 대답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겠는가?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세번째는 아가페를 물어보시지 않으시고 베드로의 대답을 그대로 질문하신다. "베드로야 니가 나를 친구로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은 분명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정리하면 이렇다.
예수님의 첫번째, 두번째 질문은 “베드로야 니가 여기 니 동생 보다, 친한 친구들 보다 나를 아가파스, 생명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느냐?” 이것을 물어 보신 것이고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 저는 그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친구로서의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잘 아십니다.” 이런 의미가 이면에 있었을 것이다.
3번째 질문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질문이 바뀌였다. "베드로야 니가 나를 휠레오, 친구로 사랑하느냐?" 그럴 때 베드로의 대답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베드로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가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있지만 그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아가파스의 사랑은 없었다. 그러니까 갈릴리로 돌아와 물고기를 잡고 있지 않았겠는가?
예수님의 질문이 변하는 것을 보며 예수님의 마음을 본다.
인간적인 표현을 쓰자면 예수님이 너무 불쌍해 보이신다. 이런 마음을 가진 베드로라도 “내 어린 양을 먹이고, 치고, 돌봐 달라” 부탁을 할 사람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몸으로 하늘 보좌로 승천하셔야 하는데 남아 있는 자녀들이 염려가 되신 것이다. 같이 있지 못하는 자녀들이 걱정되신 것이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떠난 베드로를 친히 찾아가서 손수 밥을 지어 먹이시고 3번이나 부탁 하신 것이다.
“니가 나를 생명처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친구처럼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좋다 내 어린 양들을 먹여주고 돌봐주고 보살펴 줘라 내가 부탁하마”
베드로가 3번 “사랑합니다” 고백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베드로의 속을 보면 당시만해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끝까지 부탁하셨던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내 어린 양들을 먹여주고, 내 양들을 돌봐 주고, 내 양들을 보살펴 주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충분하다 그 은혜가 차고 넘치는데, 현실이 두려워, 다 포기하고 집에 돌아와 숨어 사는, 마음도 떠난 베드로를 찾아 가서 내 양들을 돌봐 달라, 내 자식들을, 내 백성들을 돌봐 달라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애절하셨을까. 그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냥 승천하셔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있겠으며 누가 원망이나 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마음을 놓지 못하셨다. 누구에게라도 부탁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내 새끼, 내 자식들을 돌봐 줄 사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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