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오늘 새벽예배를 마치고 기도 중에 한명의 용사가 강대상에 올라와 고민을 이야기 한다.
"목사님, 말씀과 기도로 모든 것이 변할 수 있습니까? 목사님, 군생활하면서 제 믿음과 신앙생활에 부족함을 많이 느낌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고 하나님에 대한 회의감이 듭니다"
이 친구는 신학생이다. 신학생으로서 군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또 그로인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드는 회의적인 생각들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 시절 나도 그랬으니까...
하나님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들고 하나님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이 드는가? 고민하지 마라 당연한 현상이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고민하는가? 그것도 고민하지 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나님과 구원에 관해 회의가 들고 사역자로서의 미래가 불안한 신학생이나 청년들은 이 말을 명심하길 바란다.
죄의 법 아래 사는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고 믿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 수 있다고 보는가? 우리는 단지 성경을 믿으며 순종하며 하나님의 시간과 때를 참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가? 내 마음속의 확신에 의지하지 마라. 뒤돌아서면 변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마음의 확신이 아니라 말씀의 확신만 있으면 된다. 마음을 붙잡지 말고 성경을 붙잡으면 된다. 혹시 구원의 확신이 없어 고민하는 신학생이 있는가? 그러면 이 말씀을 구원의 확신으로 믿고 살아가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에 이보다 더 분명한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기도하다 입신(入神)하여 천국에 갔다오고, 극한 병에서 기적같이 치유되고, 사업의 실패로 고난중에 하나님을 만나 불같은 확신을 가져야만 그것이 구원과 믿음의 확신이라 생각하는가? 성경말씀은 이 모든 것 위에 있다.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풍전등화 같은 내 마음의 확신이 아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구원의 확신이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확신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의 확신에 기대지 마라. 사람마음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가능한 일이 아니다. 마음이 아니라 말씀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말씀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확신이다. 어려워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다.
또한 신학생으로서 부족한 인생을 고민하는가? 돈이건 영성이건 실력이건 뭘 해도 부족하고 궁핍하여 고민하는 신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목사가 되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이다. 신학교 시절은 뭘해도 부족함을 느껴야 한다. 아주 처절하게 느껴야 한다.
20년 전 한명의 교수님 말씀을 기억한다. 신학생들 신학교에 입학하면 가슴속에 대형 풍선들을 품고 들어온다. 다 조용기 목사가 되고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되고 최고의 찬양사역자가 되겠다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신학교에 오지만 신학교를 졸업하면 그 큰 풍선이 터져서 농구공이 된다. 그리고 전도사로 사역을 하면 농구공이 또 터져서 핸드볼 공이 된다. 그리고 목사로 사역을 하면 그 핸드볼 공이 터지고 또 터지고 또 터져서 결국 한주먹의 야구공이 된다. 야구공이 됐을 때 비로서 누군가에 던져지고 방망이에 맞아도 깨지거나 찢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역은 내 속의 꿈같은 풍선을 터트리는 것이다. 내 안에 풍선을 터트리는 것이 사역의 시작이고 신학생의 시간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내 모습에 자괴감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사역의 시작이고 그래야 단단한 야구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구원의 확신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확신을 갖고 싶다면 마음의 확신을 찾지마라. 마음의 확신은 길도 아니고 방법도 아니다. 신학생으로서 크리스찬으로서 부족함을 느끼는가? 당연한 일 이다. 내 안에 있는 풍선부터 터트려야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라. 이것저것 붙잡아 보고, 찾아보고, 메달리고, 기웃거리고, 여기저기 줄을 대고 비굴하게 살지말고 성경안에 길이 있고 답이 있고 확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마라.
성경안에 사역자의 미래와 살 길이 있다. 우리의 기업(基業)은 오직 하늘에 있는 것이다.